어린 시절의 섬에서 시작된 음악의 기억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에게 맨섬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닙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고, 어린 시절의 첫 3년 반을 아일랜드해에 있는 맨섬에서 보냈습니다. 초원과 바다가 가까이 있던 그곳에서 그는 비발디의 ‘사계’를 처음 들었습니다.
맨섬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자리한 영국 왕실령입니다. 왕실령은 영국 왕실과 관련된 자치 지역을 뜻하며, 맨섬은 영국 본토와는 구분되는 자체 행정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한수진에게 섬의 풍경과 어린 시절의 음악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이어지는 기억의 배경이 됐습니다.
익숙한 명곡을 다시 선택한 이유
한수진은 최근 두 번째 앨범 ‘사계’를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은 그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주곡을 녹음한 첫 앨범이기도 합니다. 협주곡은 독주자가 중심이 되어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와 음악적으로 주고받는 형식으로, 한 사람이 이끄는 선율과 여러 악기의 소리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비발디의 ‘사계’는 오랫동안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고 녹음된 작품입니다. 한수진은 수많은 명연주가 쌓인 곡을 왜 다시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같은 악보를 연주해도 연주자의 경험과 시선을 거치면 음악은 달라질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연주자들이 같은 악보에 충실하더라도, 각자의 프리즘을 통과해 나온 음악은 결국 다르게 들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프리즘은 빛을 통과시켜 여러 색으로 나누는 투명한 물체를 말합니다. 한수진은 이를 연주자의 개성과 경험에 빗대어, 하나의 악보가 사람마다 다른 소리와 감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
이번 앨범은 지난해 9월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됐습니다. 비틀스가 음악을 녹음한 장소로도 잘 알려진 이 스튜디오에서 한수진은 영국 실내악단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실내악단은 비교적 적은 인원의 연주자가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가리킵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녹음은 독주자의 연주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독주 악기의 선율과 여러 악기의 반응, 전체적인 속도와 소리의 균형이 맞물려야 합니다. 한수진의 첫 협주곡 앨범이라는 점에서 이번 작업은 솔로 연주 중심의 음반을 넘어, 다른 연주자들과 만들어 낸 음악적 대화를 담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계절을 그린 음악, 연주자마다 달라지는 풍경
비발디의 ‘사계’는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표현한 네 편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8세기 유럽의 바로크 시대에 작곡된 작품으로, 바로크 시대는 화려한 장식과 뚜렷한 리듬이 특징이었던 음악·예술의 흐름을 말합니다. 새가 지저귀는 봄이나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여름처럼, 자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적 표현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곡의 매력은 계절을 소리로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연주자는 선율을 얼마나 부드럽게 이어 갈지, 리듬을 얼마나 힘 있게 밀고 나갈지, 오케스트라와 어떤 균형을 만들지 선택해야 합니다. 같은 풍경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듯, 같은 악보도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새로운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 봄은 가볍고 밝은 움직임으로 생동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여름은 열기와 긴장감을 강조해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만들 수 있습니다.
- 가을과 겨울은 수확의 활기나 차가운 계절의 고요함처럼 서로 다른 분위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작품에 정해진 정답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주자는 작곡가가 남긴 악보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감각과 음악적 경험을 더해 청중에게 새로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맨섬의 기억이 오늘의 연주로
한수진이 어린 시절 맨섬에서 들은 ‘사계’는 이번 앨범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그는 초원과 바다를 마주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곡을 자신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봅니다. 이번 음반은 단순히 유명한 작품을 새로 연주한 기록을 넘어, 한 사람의 성장과 음악적 기억이 어떻게 해석으로 이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물론 앨범에 담긴 연주가 한수진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음악은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복사하기보다, 시간이 흐른 뒤 현재의 연주자가 그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청중 역시 자신만의 계절과 장소를 떠올리며 익숙한 선율을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명곡을 새롭게 듣는 방법
‘사계’처럼 잘 알려진 작품을 다시 녹음하는 일은 연주자에게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청중에게 이미 익숙한 해석과 비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익숙한 곡은 작은 차이도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해, 연주자가 어떤 소리와 감정을 선택했는지 귀 기울여 듣게 합니다.
이번 앨범은 한수진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만든 첫 협주곡 음반이자, 맨섬에서 시작된 음악적 기억을 현재의 연주로 연결한 작업입니다. 그의 설명처럼 같은 악보도 연주자의 경험을 거치면 다른 음악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계’를 다시 들을 때, 청중은 자신의 기억과 한수진의 시선이 만나는 새로운 풍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